

엔비디아, 정체된 회사에서 ‘라스트 컴퍼니’로
정혜진 [09경영] 서울경제신문 기자
2021년 말 실리콘밸리 특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속 자체가 ‘훈장’으로 여겨지는 애플, 구글 등 빅테크 본사 직원들도 항상 불안해하며 ‘사표’를 품고 있었습니다. 커리어 개발을 어느 가치 보다 중시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균형추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를 테면 보상이 크지만 일의 강도가 너무 세다면 좀 더 느슨한 곳으로 이동한다거나 회사가 크고 인지도가 좋더라도 맡은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봉과 경력을 동시에 키울 방법을 고민하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회사를 마지막 회사로 삼고 싶어요”
“이 회사에서 은퇴하고 싶어요”
경력이 한창인 젊은 엔지니어들에게서 이 같은 이야기를 듣자 ‘뭔가 다르다’는 직업인의 촉이 발동했습니다. 한 회사를 탐구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오늘 날 실리콘밸리는 물론 전 세계 AI 패권의 중심이 된 엔비디아 이야기입니다. 엔비디아는 한때 정체된 회사였습니다. 1993년 개인용 PC 시대를 앞두고 누구나 삼차원의 그래픽으로 게임을 즐기게 될 것이라는 비전 아래 탄생한 이 회사는 한때 이백여 곳에 달하는 경쟁사들이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파산 위기를 겪어내고 경쟁자들이 모두 사라져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에서 독보적인 1위가 됐을 때 회사는 성장의 돌파구를 잃었습니다.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게다가 GPU의 패키징 과정에서 생긴 결함에서 발생한 과열 문제로 신뢰도까지 땅에 떨어지면서 2008년 말에는 엔비디아의 주가는 전년 대비 80% 급락했고 공매도 세력의 타깃이 됐습니다. 창업과 동시에 슈퍼스타로 빅테크 반열에 오른 구글이나 메타(옛 페이스북), 테슬라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2016년 8월 엔비디아가 DGX1(최초의 슈퍼컴퓨터)을 오픈AI에 배달 후 서명하는 모습 (출처: 일론머스크 엑스 계정)

2023년 엔비디아 보이저 사옥에서
한때 월스트리트의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성장 곡선이 고꾸라진 회사로 취급했던 엔비디아는 불과 10년이 채 안 돼 완벽한 턴어라운드를 이뤄냈습니다. 2022년 말 출시된 챗GPT가 쏘아 올린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에 와서는 대체 불가능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AI 가속기로 전 세계 컴퓨팅 인프라의 할당권을 쥐게 되면서 ‘을’에 위치해 처한 적 없던 빅테크들이 목을 빼고 구애하고 모두가 젠슨 황의 입에 집중하는 ‘팍스(Pax) 엔비디아나’1) 현상을 이끌고 있습니다.
1) 로마로 인한 평화라는 의미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엔비디아의 결합으로 만든 용어
많은 이들이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2016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비영리 기업에 젠슨 황이 엔비디아 최초의 AI 슈퍼컴퓨터인 ‘DGX-1’를 배달한 뒤 서명을 새겨 넣었던 때를 꼽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챗GPT를 탄생시킨 오픈AI입니다. 저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젠슨 황의 선택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주가가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던 2010년대 초 젠슨 황은 두 가지 선택을 합니다. 하나는 당시 수억 달러의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전망되던 ‘모바일 칩’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모바일을 가리키고 있었고 엔비디아는 마침 5년 이상 개발에 주력했던 ‘테그라 칩’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모뎀 칩의 강자인 퀄컴과 경쟁하기 위해 영국의 모뎀 칩 회사 ‘아이세라’를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퀄컴 같은 기존 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에서는 게을러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도록 내버려둬도 됩니다. 대신에 우리가 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일 말이죠”2)
2) 2023년 11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 팟캐스트 대담 중에서
모바일 시장에서 빠져나온 엔비디아는 어디로 향했을까요. 심층신경망(deep neural networks)을 이용한 학습 방식인 ‘딥러닝’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십억 달러의 시장에서 벗어나 언제 수익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는 미개척지로 가는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주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방이 주류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는 풍향계가 있었습니다. 2006년 GPU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인 ‘CUDA(쿠다)’를 개발해 내놓은 뒤 수년간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며 잠재적 소비자들을 찾아내고 이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었습니다. AI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GPU를 활용해 CPU 대비 저비용으로 방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성과를 얻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2012년 딥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미국 토론토대 교수 연구팀은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오차율을 크게 좁히기도 했습니다. 아직 수익성은 요원했지만 CUDA 위에서 작동하며 AI 작업을 고도화할 수 있는 도구 모음인 ‘CuDNN’ 등에 과감히 투자합니다.
“더 이상 의지할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고객도 없고 경쟁사도 없으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장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제로 빌리언 달러 시장’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봇공학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딥러닝 알고리즘을 처리하는 최초의 AI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3)
3) 2024년 6월,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Caltech) 졸업 연설에서

2024년 3월 젠슨 황 CEO가 ‘엔비디아 GTC 2024’에서 새로운 아키텍처 블랙웰을 소개하는 모습 (출처: 엔비디아)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프랜차이즈 식당 데니스에서 엔비디아 공동창업자들이 사업 초창기 아이디어 회의를 하던 자리
이미 상품화된 시장에서 기꺼이 이탈하고 자신만의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든 과감히 ‘블라인드’를 내리고 방향 전환을 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때 만들어 낸 차이가 최소 5년간은 엔비디아를 넘볼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우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같은 방향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는 젠슨 황이 리더인 자신의 결정조차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고 이를 바탕으로 직원 모두가 자신이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적 정직함’을 문화적 코드로 삼고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반짝이던 기업들이 초창기 차별화된 문화를 구축하더라도 창업자가 물러나면 월가의 많은 전문가들이 최고경영자를 비롯해 C레벨들에 포진하고 위계가 늘어나며 민첩함을 잃는 일종의 ‘기관화(Institutionalization)’ 과정에 해당하는 ‘실리콘밸리 컴퍼니화’를 겪습니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거의 유일하게 창업자가 30년 이상 재임하며 실리콘밸리 내에서 가장 특색 있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회사이기도 합니다. 애플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선 엔비디아가 실리콘밸리의 ‘라스트 컴퍼니’가 될 수 있을지, 이전 버전의 엔비디아조차 먹잇감으로 삼으며 최상위포식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주목할 이유입니다.
“먹이를 찾아나서든 혹은 먹잇감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든, 여러분은 달리고 있을 겁니다. 종종 어느 쪽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 수 있어요. 명심할 것은 단 한 가지, ‘걷지 말고 뛰어라’는 겁니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요”4)
4) 2023년 5월, 국립대만대학교 졸업식 축하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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